믿음에 대하여

낙 서 2015. 3. 31. 02:35

나는 프랑스에 살고 있다.

여기는 많은 종교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내가 말하는 종교는 종교가 삶인 그런 종교를 말한다.

 

종교가 일상의 삶을 지배하는 종교를 말한다.

그들에게 믿음은 현실이다 즉 관념과 실재가 하나여서 분리가 전혀 되지 않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이들이 많은 믿음이 없는 이들과 산다면 그들은 특수한 직업을 가진 성직가일 가능성이 높고 아니면  미친 이들일것이다.

한 종교가 국교인 나라는 그런 일상적인 종교적인 삶이 문제가 없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는 다 종교의 나라에서는 분명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

어디서나 종교적 표현을 볼 수가 있다.

이런 종교적 표현으로 인해 아직까지는 심한 분쟁은 없었지만 아니 있으면 안된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최소한 종교로 인한 전쟁은 없었다.

종교 전쟁은 다른 전쟁과는 다르다 아주 잔인해서 민족간의 전쟁 즉 살(flesh)들의 싸움뿐만이 아니라 정신의 싸움인지라 조금의 양보를 행하지 못한다.

이미 십자군 전쟁 아니 그 이전에도 현재에도 이런 전쟁은 수행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신의 죽음보다는 살의 죽음에 더 괴로워한다.

즉 우리나라는 정신보다는 혈연 지연 등등 살 부문에 더 많은 비중은 두는 것 같다.

정치인들의 이동을 봐도 이데올로기보다는 땅 혹은 피가 더 중요하지 않던가......

말하자면 우리는 종교전쟁을 하기에는 그런 정신상태 여기서는 종교적인 믿음의 수준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른 더 재밌는 살놀이가 발생하면 현재 가지고있는 생각은 바로 접을 수 있는 상태에서는 위험 정신적인 갈등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종교는 믿는다는 명제에 사로잡힌 이상한 종교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거의 모든 한국인의 종교는 이러하다고 생각한다.

믿음의 대상이 실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한데 어느 대상을 믿는다는 것은 정신적인 자위행위이므로 그 낙을 경험하면 잊고 다시 그 즐거움이 떠오르면 다시 시작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지나친 자의행위는 건강을 해치고 특히 정신적인 손해 즉 그로인해 발생하는 죄와 벌에 대한 심리적인 공포는 어마어마해서 공동적인 카타르시스를 해결하고자 많은 모임이라든지 만남을 통해 그것을 다른 것에 의해 해소시키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 종교는 일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나 우수한 이들이 많은 이 땅에서 이로인해 벌어지는 유치한 정신분열을 치료할 방법은 없는지..

 

데카르트는 스콜라 학이 성행하던 시기에 그의 새로운 철학을 시도했다.

그래서 그의 일상은 종교적인 일상의 삶이었다.

그가 쓰고있던 책을 발매하기 전에 갈릴레오가 교회에 의해 지동설의 철회 선고를 받고는 책의 발매를 미루어야했다.

왜냐하면 물리학자인 갈릴레오와 격이 다른 정신을 다루는 철학자인 그는 정면으로 그 종교와 부딪쳐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새로운 철학을 위해 모든 것을 백지로 돌리고 완전히 우리를 포멧해두어야한다고 했다.

바이러스를 제거한 후에 새롭게 시작하자는 것이 바로 그의 대표 명제인 Cogito ergo sum인것이다.

그는 이원론이라는 교묘한 착상을 해서 종교의 박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당시에 최고 지성인들은 성직자들이었고 그들 역시 새로운 과학(그중에서 지동설도 포함..)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 중에서 정신의 실체라는 처예한 부분은 조금씩 빗나치면서 물질에 대해 그의 사상을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나한다.

한국은 데카르트 전문가들이 많지않다. 철학사에서 다루는 이상을 다루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데카르트에게서 나는 믿는다는 것에 그의 회의를 잘 인식하고 있으면서, 그가 믿는다는 것과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서 직접적인 연구를 하지 않는 이유 역시 이해한다.

이 두서없는 글은 데카르트적인 회의에서 시작되며 앞으로도 그 회의는 기다리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Posted by A la jo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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